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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의 사견으로는, 현재 전해지는 대동류의 주된 갈래는 다음과 같이 여덟 제자를 중심으로 계파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모든 계파가 망라되어 있지 않음으로 주의할 것.(이하 경칭 생략. 가급적 일본어의 장음長音 과 일본어의 청음清音을 살려 표기하였다. -예: 다케다x 타케다o)
후사를 남긴 제자들을 중심으로
타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
1916년 홋카이도 키타미(北見) 유우베츠(湧別) 지역 출생.
타케다 소오카쿠의 셋째 아들. 아버지에게 교수대리를 허가받은 인물로, 본업은 경찰관이었고, 경찰을 은퇴한 뒤로는 야마다 수산(山田水産) 이라는 직장에 다닌 직장인이었다.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과 오노하잇토류(小野派一刀流) 검술을 통합하여, 종합무술로서의 ‘대동류합기무도(大東流合気武道)’를 표방하고, 홋카이도의 아바시리시(網走市)에서 ‘대동관(다이토오칸:大東館)‘이라는 도장을 운영,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아버지의 제자들을 한 명 한 명씩 직접 찾아다니며 대동류 통합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는데, 아버지 소오카쿠 사후에 냉큼 먼저 종가를 자칭해버렸던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를 설득하여 ‘종가(宗家)’의 이름을 양보받기도 하고, 면허개전(免許皆伝)을 받았던 히사 타쿠마(久琢磨)를 설득하여 대동관 본부장(大東館本部長)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만 아버지의 이름으로 설득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제자는, 본부장(本部長)으로 이름을 올려주었던 히사 타쿠마(久琢磨)와, 지부장을 맡아준 교수대리(教授代理) 마에 키쿠타로(前菊太郎) 두 사람 뿐으로, 토키무네의 후견인을 맡았던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마저 총본부장(総本部長) 직을 거절하는 등 이미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제자들 대부분이 협조를 거절하여, 안타깝게도 결국 통합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토키무네는 소오카쿠가 전처와 사별 이후 재혼한 후처 스에(スエ:막내라는 뜻)와의 사이에서 첫째 아들(전처 소생을 포함하면 셋째)로 태어났다.
소오카쿠의 첫째와 둘째 아들은 전처 소생으로, 토키무네는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셋째라는 뜻의 ‘사부로오(三郎)라는 이름을 받아 ‘소오사부로오(宗三郎 – 혹은 무네사부로오)’ 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후에 이름을 ‘토키무네(時宗)’ 라고 하게 된다.
토키무네가 중학생이던 무렵인 열네살 때, 영화관에서 일어난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탓에, 동생들은 어린 토키무네가 돌보게 되었다고 한다.
소오카쿠는 노년이 되자 거처를 고향인 후쿠시마(福島)에서, 셋째 아들과 함께 홋카이도 아바시리(網走)로 옮기게 되고, 이때 본적을 아바시리로 옮기면서 호적을 정리하였는데, 셋째 아들인 토키무네를 장남으로 호적에 올리게 된다.
토키무네는 무술을 지도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던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시범을 보이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며 대동류를 수련하였고, 아버지와 함께 ‘대동류합기유술 총무장(大東流合気柔術総務長)’으로서 사람을 지도하기에 이르게 된다.
관련된 기록으로, 히사 타쿠마(久琢磨)가 토네다치 마사오(刀禰館正雄)와 함께 소오카쿠에게 면허개전(免許皆伝)을 인가받을 당시의 영명록상에, 소오카쿠와 토키무네의 연명(連名)으로 ‘대동류합기유술 총무장(大東流合気柔術総務長)’으로서 서명을 남긴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또한, 같은 영명록에 히사와 토네다치의 자필로 ‘타케다 대선생님과 토키무네님께 면허개전의 기술을 배웠습니다(武田大先生同じく時宗殿に免許皆伝の技を教わりました)’ 라고 하는 내용으로 히사(久)와 토네다치(刀禰館)가 서명을 남긴 기록 역시 현재까지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소오카쿠가 생전에 후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탓에, 그 제자들은 ‘가독(家元) – 마츠다 토시미(松田敏美)’, ‘종가(宗家) –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총주(総主) – 야마모토 카쿠요시(山本角義)‘ 등을 자칭하며, 저마다 스스로가 소오카쿠의 뒤를 이었음을 주장한 바 있으나, 자칭한 이들 중 누구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다만, 말년에 들어 셋째 아들인 토키무네를 굳이 장남으로 호적에 올렸던 점, 영명록에 아들과 함께 ‘총무장’의 이름을 연명으로 사용했던 점, ‘면허개전의 지도자’로서 아들의 이름을 올렸던 점 등을 고려하자면, 소오카쿠는 아들에게 후사를 물려줄 생각으로 나름의 후계자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1989년 11월 아내와 사별한 이후 병을 얻게 되었고, 이후 만년은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1993년 12월 2일 사망하였다. 향년 78세. 슬하에는 아들 없이 딸만 둘이 있었다. 큰 딸은 쿄오코(京子), 작은 딸 노부코(信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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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 타쿠마(久琢磨)
1895년11월3일 코오치현(高知県) 출생.
타케다 소오카쿠(武田惣角)와 그 아들 토키무네(時宗)로 부터 면허개전(免許皆伝)을 받은 인물. 본업으로 아사히 신문사 서무부장을 지냈다.
학생때 스모 선수로 대회 우승을 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대동류를 배우기 전부터 체격이 좋고 단련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히사는 먼저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에게 입문한 이후, 나중에 타케다 소오카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오오사카에서 칸사이아이키도클럽을 설립, 대동류를 지도하였다.
소오카쿠에게 면허개전을 받은 것은, 기록상 확인되는 인물로는 히사와, 히사의 직장 동료였던 토네다치 마사오(刀禰館正雄) 단 두명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은 토네다치가 더 높았지만 직속 상사는 아니었다)
히사는 비단 증서로서 면허개전을 인가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소오카쿠에게 가르침을 받은 당일에, 배운 기술을 즉시 재현하여 당시의 최신 카메라에 담아 기록으로 남긴다고 하는 참신한 발상을 통해, 소오카쿠의 기술을 비교적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이때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총전 11권(総伝11巻:大東流合気武道伝書全十一巻)이으로, 이를 통해 히사 계통은 다른 어느 계통보다 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소오카쿠의 가르침을 자료로 남길 수 있었다.
소오카쿠 사후에도 히사는 토키무네와는 원만히 교류하여, 토키무네로부터 대동관 본부장(大東館本部長)으로 추대된 바 있다.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사와 함께 면허개전을 받았던 토네다치 마사오(刀禰館正雄)가 소오카쿠보다 먼저 사망하였던 관계로, 홀로 남은 히사는 ‘스승으로부터 대동류를 전할 책임을 물려받았다’고 하는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데,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키무네에게 협조하여 본부장 직을 수락했던 것도, 그러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볼 수 있다.
히사는 결혼을 세 번 하였는데, 세 번 모두 부인과 사별하였다.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이 있었기 때문에, 양자로 아들을 들였으나 요절하였다. 만년에 뇌졸중을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편이었다. 그에 더해 정치적 문제로 인해 아사히 신문사를 그만 두게 되고, 그 뒤로 몇 번 직장을 옮겼으나,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탓에 만년을 힘들게 보냈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생활마저 어렵던 히사는, 결국 운영하던 도장을 접고 누님이 살고 있던 토오쿄오 스기나미구(東京都杉並区)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히사가 도장을 폐관하게 되자, 히사의 제자들은 서로 배운 것을 공유하기 위해 모여서 합숙 행사를 열게 되었는데, 첫번째 행사에서 모두가 의기투합하게 되었고, 이 합숙 행사를 계기로 스승의 이름자를 빌린 ‘타쿠마카이(琢磨会)‘ 라고 하는, 제자들의 연합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 후로 많은 질곡을 겪었으나, 타쿠마카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0년 10월 30일, 오오사카시내(大阪市内) 병원에 입원중 가족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자인 코바야시 키요히로(小林清泰) 홀로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향년 8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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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1902년 7월 3일 홋카이도 키타미(北見) 유우베츠(湧別) 지역 출생.
타케다 소오카쿠(武田惣角)에게 대리교수(代理教授)를 인가받은 인물. 소오카쿠의 수제자로 꼽을만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소오카쿠에게 대리교수를 인가받았으나, 소오카쿠에게 면허개전은 인가받지 못하였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자택에 개인 도장인 사가와도장(佐川道場) 을 운영하였으나, 세력을 확장하진 않았다. 슬하에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장애를 갖고 있어 거동이 불편하였다. 숨겨진 딸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본인 이외 다른 사람의 합기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대단히 독선적인 인물로, 대동류 합기유술 ‘종가’란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타케다 소오카쿠가 사가와에게 ‘종가’를 물려줬다는 주장을 유독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데, 소오카쿠는 생전에 후사를 명확히 한 일이 없으며, 일단 소오카쿠 본인 스스로부터가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 ‘본부장(本部長)’, ‘총무장(総務長)’ 등의 직함을 사용했을 뿐, 생전에 ‘종가(宗家)’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즉, 소오카쿠 본인부터 대동류에 ‘종가제도(宗家制度)’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제자에게 ‘종가’를 물려주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일본 내에서는 그와 같은 주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가와는 대동류의 ’36대 종가’를 자칭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가와 본인부터가 대동류는 오래된 무술이 아닌, 타케다 소오카쿠의 창작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사실 그가 자칭했던 ’36대 종가’의 36이라는 숫자 역시 딱히 어떤 근거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소오카쿠가 발급했던 두루말이 문서[巻物]에 등장하는 첫 이름인 세이와 텐노(清和天皇)에 착안하여, 세이와 텐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몇 대 정도가 나올까를 생각해서 적당히 붙인 숫자라는 것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후에 스승의 아들인 타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에게 종가를 양보하고, ‘종가의 사범’이라는 뜻으로 종범(宗範)으로 추대되어 토키무네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약간의 다툼이 있기도 했다.
지병으로 심근경색과 동맥류를 앓고 있었다고 하며, 죽을 때까지 후사를 정하지 않았다.
1998년 3월 24일 코다이라시(東京都小平市) 자택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 향년 9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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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코오도오 (堀川幸道)
1894년4월10일 홋카이도 키타미(北見) 지역 출생.
본명은 호리카와 코오타로오(幸太郎)로, 타케다 소오카쿠(武田惣角)에게 교수대리(教授代理)를 인가받은 인물. 본업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생전에 본인의 이름을 딴 조직을 만들어 행도회(코오도오카이:幸道会)라 이름하였는데, 호리카와 사후에 분열되었다. 한국에도 알려진 오카모토 세이고오(岡本正剛)의 육방회(록뽀오카이:六方会)가 이 행도회에서 독립되어 나왔다. 호리카와의 제자인 오카모토 세이고오는 대동류에 관한 자료를 가장 먼저 공개하여 유명해진 바 있다.
일각에 따르면 호리카와가 작은 체구에 힘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오카쿠가 유술보다는 합기 위주로하였거나, 혹은 호리카와 스스로가 합기 위주로 기술을 추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학생 스모 대회 우승자였던 히사 쪽에 전해지는 기술이 상대적으로 유술의 본령에 충실한 것을 생각하보면 일리가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생전 코오도오는 문인 및 지인들로부터 “영세명인(永世名人)”으로 추대되었는데, 토키무네는 “기술은 호리카와(堀川), 면허는 히사(久), 실력은 사가와(佐川)” 라 평한 바 있다.
호리카와는 아버지와 함께 부자 2대가 소오카쿠에게 사사하였고, 소오카쿠 사후 사가와의 세미나에 참가한 바 있다.
1980년10월29일 사망. 향년 8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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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 토시미(松田敏美)
영명록상의 기록으로 미루어 1895년 무렵 출생으로 짐작되나, 정확한 생몰년월일은 불명.
본명은 마츠다 호오사쿠(松田豊作)로, 소오카쿠에게 대리교수(代理教授)를 허가받은 인물. 홋카이도 아사히카와(旭川)에 송무관(松武館)을 열고 대동류를 가르쳤다. 한국에는 한국인 장인목(張寅穆) 선생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사히카와(旭川)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것 이외에 정확한 거취가 불명하여 사망 시기도 알 수 없다. 마츠다의 아들 역시 대동류를 가르쳤다는 증언이 있으나, 마츠다의 문인들조차 연락처를 갖고 있지 않았고, 눈에 띄는 대외활동도 없었던 탓에, 일본 내에서도 자세한 것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
가르침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로하훈(いろは訓) 이라는 이름으로 정리, 1939년 ‘대동류합기유술 이로하훈(大東流合気柔術(いろは訓))이라는 이름의 서적으로 출간한 바 있는데, 제자인 오쿠야마 류우호오(奥山龍峰)가 작성한 당시 서문에는 ‘우리 마츠다 선생님은, 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께 가독(家元-기술을 전수하는 가문의 대통)을 물려받을 것을 부탁받았다’ 라고 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마츠다가 전한 계통이 다른 계통에 비해 갖는 차이점은, 상대적으로 많은 타격 기법이 남아있는 점, 단순히 몸을 쓰기 보다는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학술적인 풍격, 가르침을 꼼꼼히 기록하고 연구하는 전통 등이 비교적 잘 유지되는 편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전통의 영향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계열에 비해 유독 마츠다 계열에서 팔광류 유술(八光流柔術), 타케다류 합기지술(武田流合気之術), 무한류 아이키도(無限流合気道) 등 많은 신흥 무술이 갈라져 나왔으며, 이로 인해 일본 무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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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카쿠요시(山本角義)
1914년3월3일 아키타현(秋田県) 출생.
야마모토의 본명은 토메키치(留吉)로, 소오카쿠가 사용하던 ‘타케다 소오카쿠 미나모토노 마사요시(武田惣角 源正義)라는 이름에서 각기 한 글자(角, 義) 씩을 따와 쿠요시라고 하였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해당 이름자를 소오카쿠에게 허락받았다고 한다. 본업으로 초밥집을 하였으며, 한 번 이혼 후 재혼하였다.
소오카쿠가 임종하기 수 년 전에 입문-영명록상의 기록으로는 약 1년 반-하여 교수대리(教授代理)를 허가받은 소오카쿠 최만년의 제자로, 소오카쿠의 시신을 수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문하에는 내제자로 수행한 것이 1년 반이 뿐, 수년 전에 입문하여 배움을 이어왔다는 이야기, 카쿠요시가 소오카쿠에게 ‘대동류 합기유술 총주(総主)’라는 이름의 사용을 허가받았다는 이야기, 소오카쿠 임종 직전 합기의 마지막 비전을 전해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명확한 기록상의 근거는 없다.
카쿠요시가 아들보다 먼저 소오카쿠의 시신을 수습했기 때문에, 소오카쿠가 남긴 유품을 놓고 토키무네와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쿠요시도 본인 이외 다른 사람의 합기를 인정하지 않는 편이었다고 한다.
1982년 1월 30일 사망. 향년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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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코오타로오(吉田幸太郎)
1883년 출생.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를 타케다 소오카쿠(武田惣角)에게 소개한 인물. 소오카쿠에게는 교수대리(教授代理)를 허가받았다. 교쿠신 카라테(極真空手)의 최영의-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홋카이도에서 신문사를 경영하다가, 토오쿄오의 토시마구(東京都豊島区)로 이주하였고, 만년에는 죽기 전까지 이바라키현 히타치시(茨城県日立市)에서 지냈다.
슬하에 요시다 켄지(吉田憲治)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 요시다 켄지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하와이의 돈 엔지어(Don Angier)라는 인물이, 켄지에게서 ‘야나기류’ 라는 요시다 가문의 가전 무술을 배웠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요시다 가문에 그와 같은 무술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으며, 야나기류 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다는 증언은 요시다 코오타로오의 다른 제자들 어느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야나기류에 관해서는 사실관계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요시다 코오타로오가 극우조직인 흑룡회(黒龍会)의 일원이었다는 주장이 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가 극우조직의 일원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영어/일본어)는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흑룡회나 그 전신인 현양사의 경우, 당시의 회원명부가 현전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요시다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위키피디아 영어판 역시 다음과 같이 그가 흑룡회 회원이었다는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There have been claims that Yoshida was a member of the Kokuryukai, Amur River Society (also known as the Black Dragon Society), an ultra-nationalist organization of disenfranchised ex-samurai who promulgated “pan-Asiatic ascendancy” in line with the rise of Japanese imperialism. Others have asserted that he was a member of the Genyosha (the “Dark Ocean Society’), a previous organization founded by Toyama Mitsuru. However, the membership roles of both of these organizations are meticulously documented, and Yoshida’s name does not show up in the registry of either the Genyosha or the Kokuryukai. Therefore, although it is quite likely that Yoshida had right-wing, nationalist leanings, he was not a significant figure in the major nationalist organizations of the late Meiji and Taisho periods.Kōtarō Yoshida (martial artist) : WIKIPEDIA
1966년 사망. 향년 84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아이키도(合気道)의 창시자.
모리헤이에 대한 소오카쿠의 애정은 각별하였고, 모리헤이가 독립하여 스스로의 유파를 차리자 소오카쿠는 몹시 화를 내었다고 전해진다.
독립한 이후에도 한동안 대동류 목록[巻物]을 발급하여, 제자인 시오다 고오조오(塩田剛三), 토미키 켄지(富木謙治) 등에게는 대동류 목록을 발급해준바 있다.
우에시바는 히사 타쿠마(久琢磨)의 초기 스승이었는데, 히사를 지도할 당시에는 소오카쿠와 소원해진 시기라서 대동류라는 이름은 쓰기 싫었는지, 아사히(朝日) 신문사에서 가르친다고 하여 ‘아사히류(旭流)’라는 이름으로 대동류를 지도하였다. 히사가 소오카쿠 문하에 입문한 뒤에도 히사와의 관계는 원만하여, 후일 히사에게 ‘아이키도 8단’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 외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제자
사토오 칸미(佐藤完實)
1868년 미야기현(宮城県) 출생.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교수대리(教授代理:일종의 지도자 자격).
본명은 케이이치로오(敬一郎)로,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달인이었던 아버지 사토오 케이노신(敬之進)에게서 어려서부터 검술을 배웠다고 한다. 아버지 케이신은 달리 ‘完忠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 이름은 사다타다, 아츠시, 히로시 등으로 읽을 수 있으나 정확한 읽는 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케이이치로오 역시 후일 아버지와 같이 완전할 완(完)자를 쓰는 칸미(完實, 혹은 完美)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이 이름 역시 히로미, 마사미, 사다미 등으로 읽을 수 있으나 정확한 읽는 법은 전해지지 않았다.
사토오는 타케다 소오카쿠에게 대동류를 배운 이외에, 노구치 키요시(野口清1878-1930)에게 신도육합류(神道六合流)를 배웠다. 신도육합류는 노구치가 일곱개 유술 유파를 통합하여 창시한 신흥 유파로, 제국상무회(帝國尚武會)의 이름으로 최초의 통신교육을 실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통신교육’이 갖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신도육합류의 교습체계는 꽤나 충실했는데, 교재를 보고 수련할 수 있게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는 것은 기본이고, 상대연습 이외에도 수련용 더미(dummy)를 제작하는 방법을 소개하여 혼자서 연습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고, 제국상무회에서 주기적으로 각 지역별 세미나를 개최하여 통신교육생들을 위한 실습 지도를 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실력 평가와 승단 심사를 겸한 시합(試合)을 개최하기도 하는 등, 당시로서는 꽤나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했던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사토오는 통신교육이 아닌 노구치의 직전 제자였고, 상무제국회 지부장을 지내기도 하고, 시합에서 승리하여 승단하는 등, 적극적으로 무술을 익혔던 것으로 확인 된다. 후일 상무회 유술 6단까지 승단하였다.
본업은 미야기현의 세무관(税務管)으로, 소오카쿠 문하에서 7년을 수행한 끝에 1905년 비전오의(秘伝奥義) 목록을 받고 교수대리를 인가받았다고 하는 것이 기록으로 확인 된다. 이를 역산해 보면, 소오카쿠가 적어도 1898년에는 대동류를 본격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사망 연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