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묻는 질문 (FAQ) – 대동류에 대한 오해와 진실

자주 묻는 질문 목록 (2024/4/30 업데이트)

한국에 대동류를 가르치는 곳은 없나요?
서향파 대동류도 대동류인가요?
대동류는 한국 기원의 무술인가요?
대동류는 흑룡회와 관계가 있나요?
‘소구족(코구소쿠:小具足)’이라는 건 무엇인가요?
‘야와라’라는 이름을 들었는데, 무슨 뜻인가요?
‘대선생’이라는 표현은 어떤 경우에 쓰이나요?


Q:한국에 대동류를 가르치는 곳은 없나요?

A:현재 대동류를 지도, 혹은 수련하는 것으로 알리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동류합기유술 연심관 한국지부 (大東流合気柔術 練心館 韓國支部)
마츠다 토시미(松田敏美)선생님 계열의 대동류합기유술 연심관(大東流合気柔術 練心)의 한국지부로, 2018년부터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심관은 마츠다 토시미 선생님에게 대리교수(代理教授)를 인가받은 마에다 타케시(前田武) 선생님이 설립한 도장으로, 현재는 마에다 선생님에게 대리교수(代理教授)를 인가받은 타카세 미치오(高瀬道雄) 선생님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동류가 한국에 정식으로 ‘지부’를 개설한 것은 이 연심관의 한국지부가 최초로, 한국지부의 운영은 ‘ASAP 여성 호신술‘, ‘하누맛 스쿨(HANUMAT SHCHOOL)’로 알려진 김기태 사범님이 서울역과 군자역 쪽에서, 그리고 또다른 한국 지부를 GNK CORE, ‘유심회(柔深會) 무술연구회‘로 알려진 가범석 사범님께서 담당하고 계십니다.

김기태 사범님은 2017년 12월 일본을 방문하여 연심관을 처음 견학하게 되면서 입문을 결심하게 되었고, 가범석 사범님은 2017년 5월경 처음 대동류를 접하고 매력을 느끼고, 이후 대동류 입문을 결정, 김기태 사범님과 함께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일본의 연심관에서는 한국으로 대동류 유술/합기유술 비전목록 사범대(師範代)를 연 6-7회 파견하여 지도하는 한편, 김기태, 가범석 사범님 두 분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지도를 받아, 김기태 사범님이 2018년 11월 대동류 유술과정의 비전목록 사범대(師範代)를 인가받고 정식으로 한국에 지부를 개설한 것이 첫 지부의 개설이었습니다.

이후 김기태 사범님은 유술 사범대, 합기유술 사범대 및 대동류합기유술 비전목록을 수여받았고,  2022년 11월에는 유술 사범(師範)위를, 2023년 4월에는 합기유술 사범위를 정식으로 수여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범석 사범님 역시 대동류 유술과정의 비전목록 사범대(師範代) 를 인가 받고 지부를 개설, 꾸준히 대동류를 수련하고 계시며,  대동류 외에도 ‘류큐 무비지(琉球伝 武備誌)’를 연구 계승하고 있는 고오쥬우류(剛柔流) 이치류우카이(一粒会)의 히로오카 카즈아키(廣岡和明) 선생님께 입문, 나하테(那覇手) 계통의 고오쥬우류 및 슈리테(首里手) 계통의 쇼오린류우 (小林流)를 함께 수련하며 유술과 타격의 조화 및, 범용성 있는 다양한 몸 쓰기 연구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허일웅 명지대 명예교수님 강습회
2017년 들어 허일웅 명예교수님이 118개조/본국검 공개강습회를 열고 계십니다. 공개된 바에 따르면 타케다 소오카쿠 – 마츠다 토시미 – 장인목 – 허일웅으로 이어지는 계보라고 하며, 일본 아이키카이(合気会)의 타나카 시게호(田中茂穂) 아이키도 선생님과 기술을 교류하고 있다고 밝히고 계십니다.

장인목 선생님이 마츠다 토시미(松田敏美) 선생님께 받으신 비전목록은 현재 허일웅 교수님이 소장하고 계신데, 해당 비전목록의 구체적인 입수 경로는 밝히지 않고 계십니다. 다른 제자분들에 따르면 장인목 선생님은 생전에 비전목록을 ‘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장인목 선생님으로부터의 허교수님에 대한 대동류 전수 여부에 대해서는, 이성창 선생님, 장목구 선생님(장인목 선생님의 국무관 도장을 이어받으심), 고(故) 한종렬 교수님을 비롯한 장인목 선생님의 다른 제자분들과 허일웅 선생님간에는 상당히 입장 차이가 커서, 다른 제자분들은 허교수님이 장인목 선생님 문하에서 수련하신 일은 없다고 증언하고 계십니다. 장인목 선생님은 운영하던 도장에서 단증을 발급하셨는데, 현재로서는 허교수님에 관한 장인목 선생님의 도장(국무관) 기록이나 단증, 허교수님과 함께 지도받았다는 동료의 증언 등이 일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허교수님의 증언과 독자적인 문서(후계 증명서) 외에 실제 수련 경력을 증명할만한 자료 제시는 없는 상황입니다.

참고로, 허교수님의 제자 송일훈 박사의 석사논문(허일웅 교수님이 심사)에 소개된 ‘118개조(開祖:논문상에 이런 한자로 표기되어 있음. 일본어 발음은 ‘카이소‘)’ 기술은 모두 아이키도 기술이거나 대동류 비전목록 118개조(箇條: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 이래로 대동류에서 실제 사용되어온 용어. 일본어 발음은 ‘카죠오’)와는 관계 없는 검술/장술이었고, 허교수님이 직접 저술한 ‘대동합기도전서 (2008년 출간)’에 소개된 기술 역시 모두 한국 합기도나 아이키도 기술로, 해당 서적에 대동류만의 고유 기법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에서 대동류 각 파의 영상/서적이 출간되기 이전까지는 허교수님이 아이키도 기술 외에 ‘대동류’로서의 기술을 보여주신 일은 없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일웅 교수님은 2017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타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 선생님의 제자 ‘이시바시 요시히사(石橋義久)‘ 선생님 및 마츠다 토시미(松田敏美) 선생님의 손제자 ‘타카세 미치오(高瀬道雄)‘ 선생님을 만난 바 있습니다. 허교수님이 만나셨던 두 분께는 관리자가 모두 사실관계를 확인하였는데, 이시바시 선생님은 허일웅 교수님의 기술을 직접 본 일은 없고, 방문 당시 허교수님은 본인의 연무 ‘동영상’만을 보여주었다고 하며, 모두 대동류가 아닌 아이키도 기술이었다고 하는 것을 이시바시 선생님 본인에게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통역이 없어 실질적으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타카세 선생님 역시 통역이 없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음을 말씀하시며, ‘허교수가 토키무네 선생 계열의 기술 이름표‘를 가져와 보여주었으며, 그것이 본인의 기술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고 하시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참고로 허교수님이 2017년에 공개한 대동류 기술체계는 1개조 31수, 2개조 30수, 3개조 30수, 4개조 15수, 5개조 12수 , 합이 118개 기술로 구성되어 있으나 장인목 선생님이 전하셨던 마츠다 토시미 계열의 수련체계와는 전혀 맞지 않으며, 타케다 토키무네의 체계(1개조 30수, 2개조 30수, 3개조 30수, 4개조 15수, 5개조 13수)와 거의 흡사하며, 확인 결과 실제로 토키무네가 정리하고 이름지은 체계와 동일한 기술명칭과 체계를 사용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허교수님은 2008년 6월 30일에도 대동류 기술체계를 공개한 바 있는데, 2017년에 공개한 기술체계와는 전혀 다른 구성으로 되어 있음은 물론, 역시 장인목 선생님이 지도하셨던 기술체계와는 전혀 다른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2008년 6월 30일 공개한 대동류 기술체계
1개조 – 띄우기수.1개조 관절기.손목젖히기.사방투,입신투
2개조 – 2개조 관절기
3개조 – 3개조 관절기.3개조 정면타.잡기수.무기제압술
4개조 – 4개조 관절기.팔굽관절기.잡기수
5개조 – 5개조 팔굽관절기.
6개조 – 6개조 팔굽관절기.
7개조 – 7개조 팔굽관절기.

‘장인목 선생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분의 기술이, 스스로 공개했던 2008년의 기술체계에서 10년간 어떤 변화를 거쳐서 스승에게 배운 적이 없는 ‘토키무네 계열의 기술 체계’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대동류 홍무회 → 대동홍본류 홍무회
몇차례 공개강습회를 열어 이름이 알려진 홍무회는, 명지대학교 허일웅 명예교수님의 제자로 알려진 송일훈 박사님께서 이끄는 단체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공개된 바에 따르면 타케다 소오카쿠 – 마츠다 토시미 – 장인목 – 허일웅 – 송일훈 으로 이어진 계보라고 하며, 따로 도장은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홍무회는 전원 사범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며, 구체적인 수련 내용이나 기술체계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유술 외에 검술(小野派一刀流)도 수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오노하(小野派)의 전서 및 수련체계를 따르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 현재는 대동류 단체로서는 운영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술한바와 같이 홍무회 당시 공개했던 연무영상이나 사진, 송박사님의 석사논문에 실린 기술들은 모두가 아이키도 기술이었으며, 일본에서 공개된 그 어느 대동류의 기술과 비교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재 송일훈 박사님은 허일웅 교수님과 결별하여 ‘대동홍본류’라는 새로운 유파를 창시, 2019년 현재까지 20여차례 지도자 교습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대동홍본류의 기술은 송박사님이 수련했던 레슬링과 아이키도의 기술이 혼합된 형태로 다양한 그라운드 기술(寝技)을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대동류와 전혀 무관한 기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인의 유파를 종종 ‘고류 유술’, 혹은 ‘조선 유술’로 홍보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고류’라는 용어 자체가 근세에 발원한 유파와 구분짓기 위해 ‘오랜 과거(일본의 경우 주로 메이지 이전) 부터 전승된 전통 유파’를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고류를 표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송박사님의 스승으로 알려졌던 허일웅 교수님은 송박사님이 본인의 제자임을 부정하고 있어, 두 분 간의 증서나 전수 내용에 대한 입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합기도회
아이키카이(合気会) 계열 아이키도(合気道)를 수련하는 대한합기도회를 이끌고 계신 윤익암(윤대현) 선생님께서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계열 사가와 도장(佐川道場)과 교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협회 차원에서 따로 대동류를 지도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류합기유술한국본부
스스로 ‘포스 필라테스’를 창시하여 김포에서 필라테스를 지도하고 계신 최영철 선생님께서 ‘한국본부’란 이름으로 대동류를 지도하는 것으로 홍보하고 계십니다.
어느 계파의 한국 본부에 대당하는지 여부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전승계보 및 기술체계는 공개되어 있지 않으나, 공개된 내용으로 부터 추정하자면, 타케다 소오카쿠 – 사가와 유키요시 – 야스에 쿠니오(?) – 최영철 로 이어진 계보로 짐작됩니다. 최영철 선생님의 구체적인 대동류 수련 경력 혹은 목록이나 단증 소지 여부에 대해선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동류 비전목록상의 개별 기술 보다는 합기의 터득을 위주로 지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인의 블로그 및 카페에 토키무네 계열의 1개조 30개 기술을 지도한다는 내용의 홍보가 올라와 있는데, 그 기술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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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서향파 대동류도 대동류인가요?

A:전혀 아닙니다. 서향파대동류합기무술(西郷派大東流合気武術)은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대동류합기무도(大東流合気武道) 와 역사적/기술적 접점이 없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별개의 유파입니다. 한국에 서향파 대동류가 수입되면서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만, 서향파는 널리 알려진 ‘대동류합기유술/대동류합기무도’와는 무관한 유파입니다.

서향파 측 역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わが流は大東流ではない。これは繰り返し、言い続けたことである

우리 유파는 대동류가 아니다. 이는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わが流の大東は、甲斐武田家とも無関係だし、大東久之助の大東でもないし、また新羅三郎義光の大東の館の大東でもない。流布された大東流とは無関係である。

우리 유파의 대동(大東)은 카이 타케다 가문(甲斐武田家)과도 무관하고, 다이토오 히사노스케(大東久之助)의 대동도 아니며, 신라사부로 요시미츠(新羅三郎義光)의 대동관(大東の館)과도 무관하다. 또한, 세간에 알려진 대동류(大東流)와도 관련이 없다.

わが西郷派大東流合気武術は、以上の仮託をもって流名とする大東流合気武道ならびに大東流合気柔術とは同一ではなく、また武田惣角を中興の祖とする伝承を、系統とする団体でもない。わが流は、後世の仮託を掲げる大東流とは一切無縁であり、なんの関係もない。わが流は、わが流独自のものである。

우리 서향파대동류합기무술은, 이상의 가설*1 을 바탕으로한 유파명을 갖고 있는 대동류합기무도 및 대동류합기유술과는 같지 않으며, 타케다 소오카쿠를 중시조로 하는 전승을 계통으로 하는 단체 또한 아니다. 우리 유파는 후세에 가설을 남기는 대동류와는 일체 인연이 없으며,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 유파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유파이다.

*1: (관리자 주) 타케다 소오카쿠가 발급한 비전목록은 세이와텐노(清和天皇)로부터의 전승임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향파가 말하는 ‘가설’은 이런 세이와텐노에 대한 이야기나 신라사부로(新羅三郎)에 관한 전승을 말합니다. ‘우리는 후세에 가설을 남기지 않는다’는 서향파측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는 서향파 측의 역사주장 역시 미확인된 사실에 기반한 것이 많으나, 서향파측이 ‘타케다 소오카쿠의 대동류와는 전혀 무관함’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키백과의 서향파 대동류에 대한 역사 관련 기술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初代宗家である山下芳衛(やましたほうえい)から二代宗家の曽川和翁(そがわかずおき)に受け継がれ、現在に至る。山下芳衛より以前の伝承経路や歴史については不明な部分も多い。が、曽川和翁の代になってからは、流派のルーツを研究する過程で様々な歴史考察を展開し、時期に応じて異なった歴史観・大東流史を定義している。

초대종가인 야마시타 호오에이로부터 2대종가인 소가와 카즈오키에게 전해져 현재에 이른다. 야마시타 호오에이보다 이전의 전승경로나 역사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부분도 많다. 그러나 소가와 카즈오키 대에서부터 자파의 유래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고찰을 전개, 시기에 따라 다른 역사관/대동류사를 정의하고 있다.

初代宗家の山下芳衛が自流を大東流と呼称していたため、武田惣角を中興の祖とする大東流合気柔術と同根であると思われがちであるが、実際は全く別の思想を有している。現在では、武田惣角系の大東流等の他派とは同名であるだけの別流派、という位置付けを堅持しているようである。ただし柔術の部分の基本的な技術体系や技法名称等は大東流とかなりの部分が共通しているようである。

초대종가인 야마시타 호오에이가 자신의 유파를 대동류라 칭하였기 때문에, 다케다 소오카쿠를 중시조로 하는 대동류합기유술과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타케다 소오카쿠계의 대동류 등과는 이름만 동일한 별개의 유파 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하다. 단, 유술 부분의 기본적인 기술체계나 기술명 등은 대동류와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있다.*2

*2: (관리자 주) 대동류의 기술은 본래 대다수의 기술이 이름이 없었으며,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 많습니다. 따라서 각 기술명칭은 대동류 내에서도 각 계파별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래 이름이 없는 기술(후대에 붙여진 이름)’과의 ‘명칭의 유사성’을 근거로 들어 관련짓고자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입니다. 토키무네(武田時宗)/히사(久琢磨) 계열의 기술명의 대부분은 타케다 소오카쿠 사후 타케다 토키무네가 ‘나중에 붙인’ 이름이며, 서향파의 기술이 특정 대동류 계열(타케다 토키무네 계열)의 기술 명칭과 유사점이 드러나는 것은, 서향파의 2대 종가 소가와 카즈오키가 세력 확장을 꾀하며 ‘일본전 합기유술(日本伝合気柔術:사이비 논란이 있음)’ 계열의 일부(오오미야 시로 大宮司朗 계열)를 받아들여 타케다 토키무네가 명명한 대동류 기술 명칭을 참고로 자파의 기술을 재정리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일본내에서는 서향파를 타케다류(武田流) 등을 참고로 해서 만들어진 유사 합기계열로 보고 있으며, 서향파를 대동류로 보는 곳은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타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는 생전에 ‘대동류’의 이름을 사칭하는 서향파(西郷派)측에 항의 방문한 바 있으며, 이에 서향파 대표(종가) 소가와 카즈오키(曽川和翁)는 토키무네에게 문하로 받아줄 것을 청하며, 본래 서향파 지부장이었던 니시 류우이치로오(西龍一郎)를 토키무네 문하에 입문시켰던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니시는 서향파로 복귀하지 않고 대동류로 전향하여, 토키무네 사후에도 한동안 콘도 카츠유키의 문하에서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현재는 독립하여 큐슈 대동관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향파의 진실된 역사에 관해서는, ‘아이키 뉴스’의 편집장이면서 세계적인 아이키도 및 대동류 연구가로 활동하였던 고 스탠리 프래닌 씨가 남긴 논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번역) 서향파대동류합기무술 : 그 허실에 대하여 – 스탠리 프래닌

스탠리 씨의 논설을 요약하자면, 서향파 종가 소가와 카즈오키 씨는 처음에는 ‘자신의 스승이 마츠다 토시미 선생님에게 대동류를 배웠다’고 주장하였고, 나중에는 본인이 ‘중국 기원의 대동류 권법’의 수행자라고 주장하였으나, 나중에 다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 ‘사이고 타노모 – 사이고 시로로 이어진 무술을 배웠다’라는 주장이라는 점을, 소가와 씨가 주장했던 각 시기별로 남아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들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소가와 씨의 여러 주장은 그 어느것도 근거가 없으며, 서향파 측이 마츠다 토시미 선생님에게든 사이고 시로에게는 대동류를 배웠다면 목록이든 영명록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기록이 존재해야 하나, 전혀 그런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를 증언할 마츠다 토시미의 제자가 아직 생존해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서향파가 타케다류 합기지술(武田流合気之術)에서 갈라진 방계유파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어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1. 이름(무명) : 타케다류 합기지술은 마츠다 토시미 계열에서 갈라진 ‘팔광류 유술(八光流柔術)’을 그 모체로 하여 오오바 잇센(大庭一翁; 오오바 이치오오 라고도 알려져 있음) 이 창시한 무술이라는 것이 현재 일본 무술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 잇센(一翁)이라는 이름을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音読] ‘잇센’, 혹은 ‘이치오오’ 등으로 읽을 수 있지만, 뜻으로 읽게 되면[訓読] ‘카즈오키’라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타케다류의 오오바 씨가 주장하는 본인의 스승의 이름은 ‘나카무라 요시오키(中村吉翁)’로, 역시 ‘옹(翁)’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현재 서향파 종가를 자처하고 있는 소가와(曽川) 씨의 무명(武名) 카즈오키(和翁)라는 이름이 이 타케다류의 오오바 카즈오키의 이름에서 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2. 장소 : 오오바가 처음 타케다류를 가르쳤던 타케다류의 발상지는 후쿠오카(福岡-정확히는 키타큐슈시北九州市)이며, 타케다류 측에서 주장하는 전승 루트 또한 ‘쿠로다번(黒田藩)’, 즉 후쿠오카번(福岡藩)에서 전승되어온 무술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소가와 씨가 조직한 무술 단체중 기록상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것은, ‘대동류 수기회(大東流修気会)’ 라는 단체로, 후쿠오카(福岡-정확히는 키타큐슈시北九州市)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양측 주소지는 차로 10분 정도 거리입니다.
  3. 추측 : 소가와 씨의 수기회(大東流修気会)는, 본인 주장에 따르자면 단체의 결성이 1965년(소가와 16세)에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만, 위키백과상에 기록된 결성일은 1967년으로, 소가와 본인도 최초의 도장의 설립은 이 시기였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1967년은 오오바에게 타케다류를 배운 나카무라 히사시(中村久)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도장을 ‘본부도장’을 칭하여 독립한 해로, 이후 히사시의 단체는 일본 아이키도 연맹(日本合氣道連盟), 일본 이아이도 협회(日本居合道協会), 일본 장도 유권법회(日本杖道柔拳法会), 일본 종무도 연합회(日本綜武道連合会) 등의 이름을 거쳐 1978년에 타케다류 ‘나카무라파(中村派)’로 최종 정착하게 됩니다. 오오바가 생을 마감한 것이 1959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오오바의 외아들인 츠요시(剛之)도, 오오바 생전에 사범대(師範代)로 본부 도장에서 오오바를 대리하여 지도를 담당했던 모리모토 카즈오(森本一雄)도 결국 오오바의 뒤를 잇지 못하고, 현재 고무도 협회에 이케다 카즈아키(池田一晶) 계통이 종가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서 추측을 더해 보자면, 오오바가 후사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탓에 1959년 부터 약 8년여간 제자들 간의 분쟁이 있었고, 1967년에 이르러 나카무라와 소가와 등이 독립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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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대동류는 한국 기원의 무술인가요?

A:아닙니다.

흔히 대동류 한국기원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사실’은 다음의 1, 2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1.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源義光)이 신라묘진(新羅明神) 앞에서 원복*(성인식을 치른다는 뜻)하고, 신라사부로(新羅三郎)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 신라묘진(新羅明神)은 신라에서 도래한 신으로 여겨진다.
3. 신라묘진은 장보고라는 설이 있다.

대동류 한국기원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위의 두가지 사실(1, 2)과 한가지 설(3)을 조합하여 다음 4번과 같은 중간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4. 따라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는 신라인이다.

*사전에 기술된 ‘원복’의 의미

-위키백과의 관례에 관한 기술
관례(冠禮), 또는 원복(元服)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 국가(중국, 한국, 베트남 및 일본)에서 이루어지던 관혼상제의 하나로서, 원시 사회에서 미성년자를 한 사람의 성인(成人)으로서 인정하던 성인식에서 유래하였으며, 주로 20세가 되는 남자(여자의 경우는 15세)에게 거행되었다. 미혼(未婚)이더라도 관례를 치르고 나면 성인으로서 대우받았다.

-위키백과의 원복에 관한 기술
원복(일본어: 元服 げんぶく/げんぷく 겐푸쿠/겐부쿠[*])는 일본의 성인식 즉, 일종의 성인이 되기위한 과정이다. 무사시대에 남자가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로 머리스타일과 옷을 어른식으로 바꾸고, 관(에보시)를 쓰는 의식을 말한다. 연령은 12~16세에 행해졌다.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드린 것이라고 한다. 나라시대에서 헤이안시대로 넘어 갈때는 귀족사이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그 때는 남녀 모두가 이 의식을 했었다. 하지만, 중세에 들어와서는 남성만 하게되었다. 현재에는 그다지 행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사전
원복 [元服]
명사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례 때 입고 쓰던 어른의 의관.

-다음 사전
원복 [元服]
예전에, 성년이 되어 관례를 할 때 쓰던 어른의 옷과 갓

이제 위 결론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를 몇가지 관점에서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문제.
우선, 위 3의 ‘신라묘진 = 장보고’설은 정설로 인정되는 학설이 아닌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신라묘진이 장보고라는 설은 사료적으로 입증된 바 없습니다.

*두번째 문제
위의 첫번째 문제가 사실로 입증된다 해도, 미나모토 요시미츠가 신라인이라는 와 연결짓는데는 상당한 비약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음 실상을 알고 보면 더욱 말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사부로의 사부로(三郎)는 일본에서는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셋째아들’에게 붙이는 이름이며, 실제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는 셋째아들이었습니다.
‘대동류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는 경우 대체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의 형제는 언급되지 않는데, 그의 동복형제중 맏이인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는 하치만신(八幡神) 앞에서 원복하여 하치만타로(八幡太郎)라 불렸으며 (타로는 첫째아들이란 뜻), 둘째 형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나(源義綱)는 카모신사(賀茂神社-카모 씨의 씨족신을 모신 신사)에서 원복하여 카모지로(賀茂次郎)라 불렸습니다.

첫째의 이름 하치만타로, 둘째 카모지로, 셋째 신라사부로.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면, 이름의 구조가 성인식을 치렀던 ‘신사 이름(신의 이름)’ + ‘n번째 아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신라사부로’란 이름은 신라의 후예라는 뜻이 아니라 성인식을 치른 신사의 이름을 따왔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위의 첫번째 문제-신라묘진 = 장보고설-가 사실로 입증되었다고 가정한다손 치더라도, ‘신라’ 사부로이기 때문에 신라의 후예라는 주장은 곧 동복형제중 첫째와 둘째만 다른 계통의 후예이고 셋째만 신라(장보고)의 후예라는 뜻이 되는데, 대동류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 모순점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문제
신라 사부로가 신라묘진의 무술을 이어받았다는 근거자료는 현재까지 단 한 가지도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신라묘진이 장보고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무술이 신라사부로에게 이어졌다는 근거는 전무하다는 뜻입니다.

*네번째 문제
장보고가 후대에서 해상왕, 해신으로 칭할 정도로 제해권을 장악한 장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기지 않을까요?

-장수가 무술의 달인이면 제해권이 장악이 되는가?
-해상전투에서 백병전의 비중이 얼마나 되나?
-선상 백병전에서 맨손박투의 비중이 얼마나 되나?
-현재 전해지는 대동류, 혹은 한국 합기도에 전해지는 중심허물기 이후 제압기, 혹은 입식관절기 등의 기술이 모습이 흔들리는 선상(船上)전투에 과연 적합한 모습인가?

상식선에서 생각해볼때 이국의 선상(船上) 무술이 타국의 신사에서 대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 신사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무술이, 해당 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렀던 수많은 인물중 오직 한 명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대동류 한국기원설을 받아들이려면 위의 모순점과 희박한 가능성을 모두 돌파하고 그 ‘선상(船上) 무술’이 가전으로 이어져, 신라사부로의 후손 중 타케다 신겐(武田信義)에게 이어졌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전국(戦国) 시대 최강의 ‘기마 군단’으로 이름 높아 마상전투를 주로 벌였던 무장 타케다 신겐의 무술이, 전술한 ‘선상 무술’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다시 타케다 소오카쿠에게 이어졌다는 것에 대한 증명 역시 별도로 필요합니다.

*대동류의 문장이 장보고의 군기(軍旗)의 문장과 같다던데?
대동류의 문장은 마름모꼴 네개를 모아 하나의 큰 마름모꼴을 형성하는, 소위 타케다비시(武田菱) 라 불리는 문장으로 본래 타케다 신겐으로 유명한 카이 타케다가(甲斐武田家)의 문장입니다.

그러나 장보고 군기의 문장이라 알려진 문장은, 일본에서 흔히 가문의 문장으로 쓰이는 패턴으로 따지자면 하나비시(華菱)에 해당하며, 일본내에서는 타케다비시(武田菱)와는 전혀 다른 문장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맺으며
대동류 한국 기원설은 한국 합기도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류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여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한국 합기도는 대동류에 비해 월등한 수련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매력적인 무술임에도 왜 굳이 타국의 비주류 무술에,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 합기도가 많은 수련인구를 갖고 있는 것은, 일본의 유명한 무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분의 피나는 노력과 몸으로 하는 수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굳이 다른 무술의 이름이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지금의 모습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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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대동류는 흑룡회와 관계가 있나요?

A:현재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이 항시 들고 다니던 쇠지팡이는, 당시 기세등등하던 극우집단과의 충돌을 대비한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질 만큼, 소오카쿠 선생님은 당시의 극우 인사들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다는 것이 여러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교차확인되고 있으며, 타케다 선생님이 아사히 신문사에 방문하여 대동류를 지도하게 된 계기 역시, 당시 진보 성향의 아사히 신문사가 극우 세력에게 테러를 당할 위협에 처해있던 것을 우려 하여, 아사히 신문사 직원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대동류를 가르치려 아사히 신문사를 찾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사히의 대동류 계보를 잇는 타쿠마카이(琢磨会)의 과거 회보(会報)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의 제자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郎)가 흑룡회 회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전혀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전하는 시기별 흑룡회 회원 명부에는 요시다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도 요시다가 흑룡회 회원이었다는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There have been claims that Yoshida was a member of the Kokuryukai, Amur River Society (also known as the Black Dragon Society), an ultra-nationalist organization of disenfranchised ex-samurai who promulgated “pan-Asiatic ascendancy” in line with the rise of Japanese imperialism. Others have asserted that he was a member of the Genyosha (the “Dark Ocean Society’), a previous organization founded by Toyama Mitsuru. However, the membership roles of both of these organizations are meticulously documented, and Yoshida’s name does not show up in the registry of either the Genyosha or the Kokuryukai. Therefore, although it is quite likely that Yoshida had right-wing, nationalist leanings, he was not a significant figure in the major nationalist organizations of the late Meiji and Taisho periods.

출처 :WIKIPEDIA : Kōtarō Yoshida (martial artist)

여담입니다만, 해당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요시다 코타로가 잡지 ‘유권(柔拳:쥬켄)’를 발간했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그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권(柔拳:쥬켄)’은 ‘지비키 히데미네(地曳秀峰)’ 선생님이 제자(회원)들에게 제공했던 회원용 소식지(=회보会報)의 이름으로,  지금도 디지털로 발간되고 있습니다. 지비키 선생님은 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의 다른 제자인 호소노 츠네지로(細野恒次郎)와 요시다 코타로에게 대동류를 배운 분으로, 아마도 지비키 선생님의 인터뷰 내용 중 ‘잡지 유권(柔拳)의 편집장(요코타 카즈오)과 함께 요시다 코타로 선생님을 찾아갔다’는 내용이 ‘잡지 유권의 편집장인 요시다 코타로’로 와전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해당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吉田先生のお住まいは?

地曳 茨城県の日立市の在でした。いつも横田先生(『柔拳』編集長)と一緒にお訪ねしたのですが、私は木更津におりましたでしょ、伺うのは大変でした。一旦、東京に出て秋葉原で乗り換えて、それから日立に向かい、日立に着いたらまた、電車を乗り継いでといったいった具合でした。当時を思うとよくそんな情熱があったなあとつくづく思います。(笑)まあ、そのあと、いい技が習えると聞けば、台湾でも香港でも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がね…(笑)

요시다 선생님 댁은 어디였나요?

지비키 : 이바라키현의 히타치시에 계셨습니다. 언제나 요코타 선생(유권(柔拳)의 편집장)*1과 함께 찾아뵈었습니다만, 전 키사라즈에 있었잖아요? 찾아뵙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일단 토쿄로 가서, 아키하바라에서 갈아타서, 거기서 히타치로 출발, 히타치에 도착하면 또 전철을 계속 갈아타서…라는 식이었죠.*2 그때를 생각하면 잘도 그런 정열이 있었구나 하고 한참 생각하죠. (웃음) 뭐 그런 다음부터, 좋은 기술을 배울수 있다는 소릴 들으면, 대만이든 홍콩이든 찾아가게 되었지만요. (웃음)

출처 : 지비키 히데미네 노사 인터뷰 – 유권으로의 길(地曳秀峰老師インタビュー柔拳への道) 중 발췌

*1: (관리자 주) : 요코타 편집장 =요코타 카즈오(横田和男). 지비키 히데미네 선생님의 단체인 전일본유권연맹(全日本柔拳連盟)의 고문(顧問)으로, 연맹 회보 유권(柔拳)의 편집장을 지냄.

*2: (관리자 주) : 키사라즈(木更津)는 치바 현(千葉県) 외곽에 있는 지역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쿠아 라인(アクアライン) 이라고 하는 바닷속을 통고하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지만, 예전에 키사라즈에서 토쿄 까지는 차량으로 최소 세시간 이상 걸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토쿄에서 다시 이바라키 현(茨城県)까지도 차량으로 세시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참고로 이렇게 멀리 스승을 찾아가서 수련하는 것은 대동류에서는 드물지 않은데, 마츠다 토시미 선생님(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께 교수대리를 인가 받음)의 제자인 마에다 타케시 선생님(마츠다 토시미 선생님께 교수대리를 인가 받음)은, 자택인 군마현에서 스승의 도장이 있는 홋카이도 아사히카와(旭川)까지 수시로 찾아가 수련을 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요즘에도 차량으로 스무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타쿠마카이(琢磨会)를 설립한 코바야시 키요히로(小林清泰) 선생님은 오오사카에서부터 홋카이도에서도 북쪽 끝에 위치한 아바시리(網走)까지, 차량 기준 26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배우러 다니셨다고 하고, 육방회(六方会;록포오카이) 토치기현 아시카가(足利) 지부를 담당하였던 카나야 테츠야(金谷哲也) 선생님 또한 토치기현에서 토쿄 까지 22년간을 매주 오카모토 세이고(岡本正剛) 선생님을 찾아뵙고 수련하였다고 합니다.

지비키 히데미네 선생님은 현역에서는 은퇴하여 따님에게 자리를 물려주셨지만, 2024년에도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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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소구족(코구소쿠:小具足)’이라는 건 무엇인가요?

A:’코구소쿠(小具足)’ 란  일본식 갑주(甲冑;鎧)를 입을때 장비하는 부무장(副武装)을 의미합니다.

일본의 에도시대(江戸時代)에는, 평복에도 큰 칼인 우치카타나(打刀)와 작은 칼인 코다치(小太刀) 두 자루의 칼을 허리춤에 패용하는 것을 일종의 신분에 대한 증명으로 삼아 대도(帯刀) 라고 칭하였습니다. 평복이 아닌 일본식 갑주인 요로이(鎧)를 장비할 때는(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 대도를 주무장으로 삼되, 주무장 이외에 상대와 뒤엉켜 싸우는 근접박투시 상대의 갑주의 틈을 뚫고 치명상을 입히는데 사용하는 요로이도오시(鎧通し:갑주를 관통한다, 혹은 갑주 사이로 지나간다는 뜻)나, 이런 근접박투로 상대를 제압한 후 목을 베는데 쓰기 위한 단도(短刀)등을 패용하여 부무장으로 삼았는데, 이들 부무장을 한데 일컬어 ‘코구소쿠(小具足)’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일본 고류 무술용어로는 이들 부무장에 해당하는 단병기를 활용한 무술(유술) 기법들 역시 ‘코구소쿠(小具足)’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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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야와라’라는 이름을 들었는데, 무슨 뜻인가요?

A:’야와라’는 특정 무술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일본어로 ‘유술(柔術)’을 뜻하는 옛스러운 표현입니다.

현재 ‘유술(柔術)’이란 용어는 서브미션을 포함한 그래플링을 뜻하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해당 용어가 탄생한 일본에서는 본래 유술이란 타격 및 단병기(상술한 코구소쿠:小具足) 기법을 포함한 무술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용어로 쓰여왔습니다 . 유술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해당 기법들을 토리테(捕手), 코시노마와리(腰之廻;’허리 주변, 허리춤’이란 뜻으로, 갑주의 허리 부근데 패용하던 부무장-코구소쿠를 의미) 등으로 칭해왔으며, 달리 ‘일본의 무술’이란 뜻으로 ‘야와라(和)’, ‘야와라기(和儀)’, ‘와쥬츠(和術)’ 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화(和)’에 대해 첨언하자면,  역사적으로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왜(倭)’ 라는 한자를, 일본에선 음독(音読, 소리 나는 대로 읽기)으로 ‘와(わ)’ 라고 읽어왔고, 일본 국내에서는 이 ‘왜(倭)’에 대한 대용 한자로 같은 발음인 ‘화(和:わ, 역시 음독)’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 ‘왜(倭)’ 라는 글자를 훈독(訓読, 뜻으로 읽기)으로 읽을때는 야마토(やまと,훈독)라 읽어왔는데, 다른 표기로는 ‘대화(大和)’ 라 표기하였습니다. 이같이 ‘화(和)’ 라는 말을 일본에서 쓸 때는, 그 자체에 ‘일본’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에도 한국에서 일본식(日本式) 요리라는 뜻으로 ‘일식(日式)’ 이라 주로 표기하는 일본요리는, 일본에서는 ‘와쇼쿠(和食)’ 라고 부르며, 일본식(日本式)에 해당하는 표현은 주로 ‘와후우(和風)’ 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등, ‘화(和)’ 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일본을 뜻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이전인 일본의 전국시대(戦国時代) 까지만 해도, 이렇게 ‘화(和)’ 라고 한자로 쓰고 ‘야와라’ 라고 읽어오던 무술은,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의 무술가 세키구치 우지무네(関口氏心)가 세키구치신신류(関口新心流)를 창시하게 되면서 ‘버드나무와 같이, 적의 힘을 내 것으로 하는’ 부드러운 힘쓰기를 강조하며 처음으로 ‘부드러울 유(柔)’ 라는 글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점차로 ‘화(和)’ 대신 ‘유(柔)’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和)’를 사용하는 유파가 오히려 드물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야와라는 특정 무술을 일컫는 표현이 아니라, 유술의 옛스러운 표현입니다. 참고로 세키구치신신류보다 먼저 창시된 ‘타케노우치류(竹内流)’의 경우 토리테(捕手), 코시노마와리코구소쿠(腰之廻小具足) 라는 표현을 쓰며, ‘야와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타케노우치류(竹内流)’는 ‘타케우치류’ 라고 부르지 않으며, ‘타케우치류 야와라’ 라는 표현 또한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는 타케노우치류 종가/상전가 선생님들께 직접 확인한 확실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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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대선생’이라는 표현은 어떤 경우에 쓰이나요?

A:한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더 높여 이르는 표현일 뿐입니다.

일각에서는 특정 인물이 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의 영명록에 서명한 기록에 ‘타케다 대선생(武田大先生)’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대선생은 스승의 스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해당 인물은 타케다 소오카쿠의 제자가 아닌 손제자(孫弟子)’ 라는 식의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특정 인물과 상관 없이 해당 표현만을 놓고 보자면, 그 부분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명록에 동일하게 ‘타케다 대선생(武田大先生)’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을 남긴 인물로는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1922년, 1931년 영명록), 호리카와 코오도오(堀川幸道; 1930년 영명록), 히사 타쿠마(久琢磨; 1936년 영명록),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1938년 영명록), 야마모토 카쿠요시(山本角義;1941년 영명록) 등이 있으며, 이들 기록은 모두 사진 자료 등으로 현전하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술한 인물들 모두 타케다 대선생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영명록에 서명을 남겼으나, 모두 타케다 소오카쿠 선생님께 직접 교수대리(대리교수) 인가를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므로, 단순히 ‘대선생’ 이라는 표현만으로 사승관계를 단정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습니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후속 연구가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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